<header><h1>팀 켈러 “선택 교리에 대한 세 가지 의문”</header><section>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신 사람들만 그분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선택 교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서,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교리는 오랫동안 어려운 주제로 여겨졌으며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Image by sandid from Pixabay
그렇다면 선택 교리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일반적인 의문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 세 가지 예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1. 만일 선택 교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 의문은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된다. 선택 교리 자체가 이 문제를 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교리는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끌 뿐이다. 다시 말해 선택 교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즉 모든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거기에 호소하여 선택 교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도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결국 미스터리이다. 단순히 선택 교리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에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선택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하는가? 가령 내 아들이 가진 선택의 자유를 내가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된다면 그때는 자유를 존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잠시간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여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선택 교리에 대한 반론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다음의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고 가정해 보자.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겪게 될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 복음을 통해 제시될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한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 계획을 세우시는 순간 누구는 구원에 이르고 또 누구는 심판에 이르는지를 정확히 아셨을 것이다(그분은 전지하시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구원 계획을 세우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실상 누구를 선택하시고 또 누구를 선택하지 않으시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동일한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에 대해 오직 두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로 이 문제는 그분의 완전한 성품과 관련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함께 지니신 분이고, 그중 어느 성품도 다른 성품보다 우선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즉 어느 한 성품이 다른 성품에 비해 완전하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 문제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보다 더 자비로운 방법으로 성취되는 구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수준보다 절대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성하실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보게 되는 날에야, 그 안에 어떤 오류도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만일 누군가의 구원 여부가 확실히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우선 이 의문은 근시안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만일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구원 여부를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두려워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별 생각 없이 이뤄지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정말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의 구원이 계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도할 때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게 된다. 우리의 어눌한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견해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전도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벽난로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나무를 자를 수도 있지만,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는 법도 가르칠 겸 아들한테 같이 하자고 요구했다고 치자. 이때 그 아들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를 자른다고 특별히 얻는 것도 없잖아요. 제가 땔감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 일을 다 하실 걸요. 저를 얼어 죽게 놔두진 않으실 테니까요.” 이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나 혼자서 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너와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특권과 권위에는 매우 큰 축복이 뒤따른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해서는 안 된다. 즉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예측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선택 교리는 우리에게 큰 소망을 안겨다 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 대해서도 소망이 없다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수많은 이들이 너무나 완고하여 마치 선택받지 않은 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상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하지 절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도행전 18장에 가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고 격려하셨다.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와 보호 및 ‘선택’에 대해 바울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11절)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요점은 이것이다. 곧 우리 각자가 기도하며 복음을 나누게 될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중 한 명일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나는 성경을 믿고 선택에 관한 모든 가르침도 이해하는데, 왜 마음으로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힘든 것인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성격은 초자연적이어서(supernatural) 우리의 자연적 이성이나 문화로는 통합할 수 없는 내용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예를 들어 칭의 교리는 복음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관점에서 율법과 사랑은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결합된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아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복음 외에 다른 모든 철학 사상은, 율법이 최상의 가치가 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결여되어 있는 반율법주의로 기울어질 뿐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선택 교리도 복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결합된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문화나 철학이 통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 각자는 한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가 제공하는 견해를 깊이 받아들인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견해는 편향되어 있기에, 우리는 선택 교리를 실제보다 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내용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의 철학이나 종교는 언제나 숙명론에 가까운 시각을 견지한다. 이런 시각에서 개인의 자율성이란 일종의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개인주의적인’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서양의 세속주의는 스스로 진로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개인의 권리와 능력을 강하게 신뢰한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숙명론적인’ 메시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문화에서 어떠한 입장이나 성향을 가지고 성장했든지 간에, 선택이나 칭의로 표현되는 복음이 아주 미묘하게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점이 균형을 갖출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Election by Tim Keller
번역: 장성우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신 사람들만 그분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선택 교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서,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교리는 오랫동안 어려운 주제로 여겨졌으며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Image by sandid from Pixabay
그렇다면 선택 교리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일반적인 의문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 세 가지 예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1. 만일 선택 교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 의문은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된다. 선택 교리 자체가 이 문제를 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교리는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끌 뿐이다. 다시 말해 선택 교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즉 모든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거기에 호소하여 선택 교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도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결국 미스터리이다. 단순히 선택 교리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에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선택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하는가? 가령 내 아들이 가진 선택의 자유를 내가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된다면 그때는 자유를 존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잠시간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여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선택 교리에 대한 반론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다음의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고 가정해 보자.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겪게 될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 복음을 통해 제시될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한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 계획을 세우시는 순간 누구는 구원에 이르고 또 누구는 심판에 이르는지를 정확히 아셨을 것이다(그분은 전지하시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구원 계획을 세우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실상 누구를 선택하시고 또 누구를 선택하지 않으시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동일한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에 대해 오직 두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로 이 문제는 그분의 완전한 성품과 관련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함께 지니신 분이고, 그중 어느 성품도 다른 성품보다 우선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즉 어느 한 성품이 다른 성품에 비해 완전하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 문제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보다 더 자비로운 방법으로 성취되는 구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수준보다 절대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성하실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보게 되는 날에야, 그 안에 어떤 오류도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만일 누군가의 구원 여부가 확실히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우선 이 의문은 근시안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만일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구원 여부를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두려워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별 생각 없이 이뤄지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정말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의 구원이 계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도할 때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게 된다. 우리의 어눌한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견해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전도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벽난로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나무를 자를 수도 있지만,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는 법도 가르칠 겸 아들한테 같이 하자고 요구했다고 치자. 이때 그 아들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를 자른다고 특별히 얻는 것도 없잖아요. 제가 땔감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 일을 다 하실 걸요. 저를 얼어 죽게 놔두진 않으실 테니까요.” 이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나 혼자서 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너와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특권과 권위에는 매우 큰 축복이 뒤따른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해서는 안 된다. 즉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예측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선택 교리는 우리에게 큰 소망을 안겨다 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 대해서도 소망이 없다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수많은 이들이 너무나 완고하여 마치 선택받지 않은 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상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하지 절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도행전 18장에 가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고 격려하셨다.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와 보호 및 ‘선택’에 대해 바울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11절)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요점은 이것이다. 곧 우리 각자가 기도하며 복음을 나누게 될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중 한 명일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나는 성경을 믿고 선택에 관한 모든 가르침도 이해하는데, 왜 마음으로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힘든 것인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성격은 초자연적이어서(supernatural) 우리의 자연적 이성이나 문화로는 통합할 수 없는 내용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예를 들어 칭의 교리는 복음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관점에서 율법과 사랑은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결합된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아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복음 외에 다른 모든 철학 사상은, 율법이 최상의 가치가 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결여되어 있는 반율법주의로 기울어질 뿐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선택 교리도 복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결합된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문화나 철학이 통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 각자는 한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가 제공하는 견해를 깊이 받아들인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견해는 편향되어 있기에, 우리는 선택 교리를 실제보다 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내용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의 철학이나 종교는 언제나 숙명론에 가까운 시각을 견지한다. 이런 시각에서 개인의 자율성이란 일종의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개인주의적인’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서양의 세속주의는 스스로 진로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개인의 권리와 능력을 강하게 신뢰한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숙명론적인’ 메시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문화에서 어떠한 입장이나 성향을 가지고 성장했든지 간에, 선택이나 칭의로 표현되는 복음이 아주 미묘하게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점이 균형을 갖출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Election by Tim Keller
번역: 장성우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