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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편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랑 가득한 말씀을 전합니다.
변화는 내면으로부터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사람이 변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Inside-Out (내면에서 시작해서 외부가 변화되는 것 )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 가령 비즈니스에 성공하려는 사람은 대중적 이미지와 대인 관계 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근면 , 인내 , 용기 , 절제 , 충성 같은 성품에 집중할 때 진정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코비가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 자신의 내면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럼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1. Inside - Out의 시작은 “내”가 아 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하십시오./
변화는 변화되고 싶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변화를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먼저 고백하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데서 출발 합니다 . 내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 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2. 패 러 다 임 의 변화는 “자연법칙 ”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 ”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
코비는 Inside-Out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칙 중심의 패러다임 ”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원칙 기준으로 착각합니다 . 아닙니다 .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
말씀을 자신의 의식과 가치관의 절대기준으로 삼을 때 변화의 방향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
3. 진정한 변화는‘선택 ’을 통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
내면의 변화는“내”가 아니라 “하나님 ”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
사람의 힘으로 변화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면 인식 할 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따 라 ‘선택 ’해야 하는 책임은 바로‘나 ’에게 있는 것 입니다 . 성령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 육신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
내 삶의 변화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b)
눈물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대학 2 학년 여름으로 기억 합 니 다 .
서울 서대문에 있는 대학생 선교회 (CCC) 에서 리더훈련 (LTC) 에 참여 했었는데 그날 저녁 집회 강사는 김준곤 목사님이었습니다 . 마태복음 16 장을 본문으로, 주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던 질문이 그 날 김목사님을 통하여 나 에게 던져졌을 때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나에게 오셔서 물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
그날 밤 숙소에 올라와 저는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저려오는 것을 느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 나의 주님입니다 ”“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고백했습니다 .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 회개의 눈물 이었고, 친구 되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
목사 안수식이 있던 날 , 안수 자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몇 마디 말끝에 가슴이 울컥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 주셨다는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
저는 육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격성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
아버지는 내가 성공했을 때나 실패 했을 때도 변함없이 내 옆에 계셨고, 나의 약하고 못 난 부분까지 다 받아주셨습니다 . 자신의 재산을 다 날려 먹은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시고 ,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시고, 언제나 더 주고 싶어 하시는 변함 없는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옵니다 . 또한 나는 그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 해 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보다 더 큰 사랑 , 독생 자까지 죽게 하시는 사랑을 저 에게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설교 중에 , ‘십자가’ 혹은 ‘아버지 ’ 이야기에 포커스가 맞춰지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눈물 흘리는 일이 더 잦아졌습니다 .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 에서 입니다 . (요11:35) 이 눈물은 인간적인 사사로운 정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죽음의 저주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 ’ 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
또 한 번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눅19:41 ) 민족의 현실과 앞날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
저는 예수님이 흘리셨던 눈물을 흘리기를 원합니다 .
당장 교회의 부 흥을 위해서 보다는 죽어 가는 영혼, 믿음이 병들어 성숙하지 못한 영혼을 보면서 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또 민 족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 하면서 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실 뿐 아니라 그 눈물을 기록하시고 간직하신다 (시 56:8)했습니다 . 그것은 어 느 날 그 눈물을 기쁨과 영광의 보석으로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 주님을 따르면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 을 것입니다 .
소명자는 행복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누구든지 성직자가 되려면 비밀한 소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비밀한 소명 ’ 이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이지 교회의 그 누구도 그 분이 하나님께 비밀한 소명을 받았는지 증명해 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
그래서 칼뱅은 재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깨끗하지 못한 양심을 가지고 소명이 없는데도 소명이 있는 척하고 먹고 살기 위하여 목사가 되었다 . 그런데 그 사악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 사람을 교회의 목회자로 받았을 때에는 소명을 받은 자처럼 일을 할 수도 있다”이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약점입니다 .
비밀한 소명과 공적인 소명이 반드시 일치 하는 것이 본인과 교회에 가장 좋지만 비밀한 소명 없이 공적인 소명을 가지고 목회의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물론 이 이야기는 목회자에게만 해당 되는 소명은 아닙니다 . 누구 든지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면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일에 , 직업을 통하여 거룩하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꼭 목회자만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구원 받은 모든 성도는 스스로“비밀한 소명 ”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 차이는 있지만 소명자입니다 .
저는 마흔 일곱 살 때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했습니다 . 중 고등학생 때에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오신 목사님마다 목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 그러나 저는 장로는 될지라도 목사는‘별로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 주위에 대학 입학 예비고사 시험에 떨어진 1년 선배 형이 신학교 가는 것을 보고 저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
결혼을 하려 할 때 지금의 아내는“목사 사모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 그때 저는 성경이 알고 싶어 “신학 공부는 하겠지만 목회는 할 마음이 없다 ”고 했는데 어떻게 결혼이 성사 된 후에 아내는“목회 할꺼다 ”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 아마 결혼을 이루시려고 성령님이 다르게 전달하신 것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
1998 년 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비즈니스의 길을 접고 오피스텔 마루바닥에 홀로 엎드려 하나님 앞에 항복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라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사람 살리는 일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일이 있을까... 하나님은 그 길을 선택하도록 나를 밀어 넣어시고, 나를 빚어 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다가 비록 세상 사람이 볼 때 실패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이 아니고는 내가 걸어야할 갈 길이 없고, 이 일이 아니고는 생명 걸고 할 일이 없습니다 . 왜냐하면 나의 소명이니까요 옛날 비즈니스 하여 돈을 많이 벌 때보다 저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
시계와 나침반
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약 20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직장 생활과 무역과 생산을 겸한 사업체를 경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
한국의 7-80 년 대 에 공장 에서 수출품을 생산하여, 품질을 컨트롤하고 선적 납기를 맞춘다는 비즈니스 자체가 늘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습니다 .
그러다 보니 스케줄과 목표, 효율 즉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었습니다 . 아침부터 때로는 밤 늦게까지 지칠 정도로 ‘발등에 불끄기 ’‘긴급한 일 ’처리로 하루를 다 보내곤 했습니다 .
일터 에서는 이렇게 ‘바쁜 사람 ’이 ‘중요한 사람 ’이요, 능력 있는 사람 '으로 인식되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도 젊은 그 시절에 참으로 열심히 일했다 싶습니다 .
돌이켜 보면,‘긴급한 일 ’처리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긴급성'이 우리 인생을 지배해 버리고 ‘중요성'이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은 진짜 문제입니다 .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급한 일'을 ‘중요한 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
스티븐 코비 박사는 이 문제를 시계와 나침반 , 즉 우리 인생의 두 요소인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의 특성으로 표현 한 바 있습니다 .
시계는 우리의 일정, 계획, 목표, 능률을 나타냅니다 . 나침반은 우리의 비전 , 가치 , 원칙 , 사명, 양심, 방향 등을 나타냅니다 .
일을 더 빨리 , 더 많이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내가 일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보다 , “내가 올 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
또 오늘 하루를 ‘중요한 일 '을 먼저 하는가 ? 아니면 ‘긴급한 일'에 매달리는가 ?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
말씀 묵상 (Q.T.), 기도, 예배 , 계획, 준비, 예방 , 가치규명 , 인간 관계 구축은 긴급하지는 않을 지라도 인생에 중요한 일입니다 .
“인생을 시속 200km 로 달려 왔는데 방향이 틀렸다면 ?” 주님 앞에서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
나침반이 시계를 끌어 가는 인생은 후회가 없습니다 ...
교회선택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평신도로 있을 때 교회를 두어 번 옮긴 경험이 있습니다 . 첫 번은 목사님과의 관계로 그 교회를 갔기 때문에 선택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 또 한 번은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 영적인 가정’ 인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 당시는 저 스스로 교회 선택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 때여서 그냥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다가 찬양이 살아 있고 예배가 은혜롭다 생각되는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당시의 교회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 그 때 그 교회에서 ‘영적 성장에 지름길이 있다는 것’‘ 사람이 말씀 양육을 통해 변한다는 것’, ‘교회라고 다 동일하지 않고 좋은 교회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경험한 것은 제 인생의 큰 유익이었습니다 .
목사는 교인을 양육할 책임은 있지만 교인을 선택할 수 는 없습니다 . 그러나 평신도는 부득불 교회를 선택해야 할 형편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럴 때 저라면 다음 몇 가지는 반드시 고려 할 것 같습니다 .
첫째 , 믿음의 성숙을 위한 양육과 훈련 시스템이 있는가 ? 공과 책에 의해 형식 적이고 지식만 축적 하는 성경공부나 강 의 말고, 정해진 시간 , 정해진 기간 동안 과제와 삶을 목사와 함께 나누는( 막 3:14-15) ( 교육이란 이름의 사육이 아닌 ) 진지한 말씀의 양육훈련 ( 살전 2 : 7-12) 을 통하여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는 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
둘째 , 교회의 비전이 녹아 있는 소그룹 모임이 있는가 ? 구호와 타이틀만 있는 비전, 형식적으로 모이는 구역조직 같은 것 말고, 마음을 터놓고 진정으로 삶을 나누며 , 같은 비전을 품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이런 모임이 있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 이런 모임이 없으면 주일 예배만 참석 하는 구경꾼 교인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
셋째, 목사의 설교가 은혜가 되는가 ? 설교를 선택의 첫째 조건으로 꼽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 하면 영적갈증이 오기 쉽습니다 . 화려한 설교는 아니더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준비에 노력이 들어간 설교, 내 삶에 적용 할 수 있는 설교를 통해 은혜가 되는 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
5%성장은 어려워도 30%성장은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의 저자 손현보 목사님은 “5% 의 꿈은 이루기 어려워도 30% 의 꿈은 이루기 쉽다.”고 단언합니다
5% 를 꿈꾸는 자는 항상 쩨쩨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대충 이루려고 합니다 .
하지만 30% 성장은 그런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생각의 혁신이 일어납니다 .
기업에서도 5% 성장을 목표로 세울 때는 전기 사용을 줄이고, 인건비를 줄이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 그러나 30% 성장을 목표로 세우면 그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혁신적인 사고의 혁명이 일어나고 방법부터 달리 할 것입니다 .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
‘한 사람이 한 명 전도하여 배가하자 ’고 슬로건을 내세웁니다 . 상식으로 생각하면 한 해에 한 명씩 전도하면 쉽게 배가 부흥 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 왜냐하면 전도 대상자로 한 명만 고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
이런 마음으로 전도 대상자를 고르다 보면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될 것 같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될 것 같이 생각 됩니다 .
전도 대상자는 가까운 사람부터 먼 곳까지 제한 없이 많이 정해야 합니다 .
조건 없이 많은 대상자를 정 할 때 이 사람은 이래서 전도해야 할 것 같고 저 사람은 저러니까 전도 할 수 있을 것 같이 여겨집니다 .
오늘 신년주일을 지키면서 조건 없이 가능한 한 많이 종이에 적어보세요. 관계전도의 시작입니다 . 대상 없이 기도 할 수 없고, 화살을 겨눌 수 없습니다. 낚시 종류와 미끼를 제대로 선택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전도는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을 전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이를 위해 기도하고, 관계 맺는 것입니다 . 대상자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을 적어보라.
최고 경영자로, 컨설턴트로 성공한 크리스토퍼 하워드는
자기 인생의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반전하게 된 전환점에 자신이 했던 일을 자주 소개합니다.
그는 한 때 집에 가스 요금을 낼 돈도 없어서 가스공급이 중단되고 끼니를 잇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침대에 뒹굴며 ‘내 인생은 왜 이리도 안 풀리는 것일까?’한숨만 내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이 자꾸 꼬여만 가는지 답답하고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그 때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훌륭한 일’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들을 종이에 적어나가는 것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남은 인생동안 꼭 경험하고 싶은 것들과 이루고 싶은 것들, 소유하고 싶은 것들과 본받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특성도 모두 적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과 직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그 외에 평소 열망하던 것들도 다 적었습니다.
그는 목표 달성의 가능성 여부는 미리 따져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적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지금은 대부분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이 적는 과정을 통해 일과 목표에 대해 잘못된 생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조사해야 하며, 성공하기 위한 태도와 습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인생에 있어서 진정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깨달음으로써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꼭 하나님께 응답받아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기도제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기도제목을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수시로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오.
삶의 목적과 열정이 분명하게 되고 뜨거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소원 가운데 “자기의 기쁘신 뜻을 심어주실 것”입니다.(빌2:13 참조)
그러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크리스마스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요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
이라 .” (갈 4:4-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1:31),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18)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1)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 이것은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도 모르고, 하나님을 찾아 갈 능력도 없으니 방법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 편으로 오시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신비요 기쁨입니다 .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와 같은 죄인의 모습과 수준으로까지 낮아지셔서 나를 만나주시다니 ...
나도 그와 같아 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아지신 것입니다 .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실 입니다 .
이 감격으로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의 방을 온전히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
옛날 인더스 강 근처에 알리 하페드라는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농장을 가지고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어느 날 동방의 현자라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있으면 나라를 살 수 있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면 자식을 왕으로 만들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그는 다이아몬드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자는 그에게 “높은 산 사이에 하얀 모래땅이 펼쳐져 있고, 그 모래땅을 가로 지르는 강을 찾으면 그곳에 다이아몬드가 있을 것이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다음 날 곧 바로 농장을 처분해 다이아몬드를 찾아 떠났습니다 . 그러나 파키스탄을 거쳐,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을 다 뒤지고 유럽까지 찾아보았지만 현자가 말한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스페인의 한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농장은 샀던 사람이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농장 사이로 흐르는 개울가에 갔다가 반짝거리는 돌맹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 알리 하페드가 그렇게 간절히 찾던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농장의 뒤뜰이 바로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골콘다 다이아몬드 광산 이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불과 5마일 정도의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 , 제사장, 서기관 등 성경을 잘 안다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고,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성탄의 의미를 너무 먼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인생의 문제의 해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집 가까이에 있는 다이어 몬드를 두고 방황한 알리 하페드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 예수님이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요3:16)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이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페트로스는 바위, 조약돌 의미)라 하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 반석이라는 뜻)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예수님은 페트로스와 페트라, 두 낱말의 Word play를 통하여 교회가 반석(페트라)되신 예수님과 그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는 믿음공동체임을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260km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사막 한가운데에 최고높이 300m의 붉은 사암으로 된 산, 소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는 페트라(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 나오는 오지의 성전)가 있습니다. ‘시크’라 불리는 바위 협곡을 지나 바위를 파내어 만든 신전과 건물(무덤 석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만납니다.
2008년 1월 단기선교를 마치고 이곳을 찾았을 때 1km정도는 바위협곡 사이를 걸어서 가고, 그 다음 1km정도는 나귀를 탔습니다. 이 나귀가 몇 십 미터 되는 낭떠러지 옆을 지날 때는 입에서 “주여!”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만약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나..그러나 나귀는 마부도 없이 잘도 갔습니다.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나귀는 낭떠러지 밑을 보지 않고 길만 본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리도 계곡을 보지 말고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벌써 10년 가까이 서커스를 하고 있는 줄꾼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줄을 타면 왜 그렇게 쉬워 보입니까?”“비결은 간단합니다. 오로지 목적지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됩니다. 밑을 보면 절대 안 됩니다. 머리가 가면 몸도 따라가야 합니다. 아래를 보면 떨어지기 쉽습니다. 항상 가려는 곳만 봐야합니다.”
우리 인생의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세상은 상처와 실패와 고통의 기억만 떠오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만 바라보면 우리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페트라 위에 세워지는 “내 교회”즉 “주님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