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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편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랑 가득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성부자, 성령 하나님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  대해  은혜를  교통하심에  있어서  성령님은  다양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대표적인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 에서  말씀과  기도의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성례는  소홀히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 못 된  것입니다말씀이 구원의  전 과정에서 일생 동안 계속 되는 최고의  우월한  방편(바빙크일 진데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읽는  것이요 성례는  눈으로  보고  먹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묵상하고듣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직접 먹으며  인식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성례를  문답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신약의  성례가  무엇입니까?

 (답)  세례와 성찬입니다.   


2)세례가 무엇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고백하는 자에게  목사가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인데  

                이는  죄에  속한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를  향한  새  사람이  살아나는  것으로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공적인  표식이요  인침입니다.

 

3)성찬은  무엇입니까?

 (답)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심으로 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고전11:23-26)

 

4)주의  성찬에  참여  하려면?

 (답) 세례  받은 자로  마땅히  주의 몸을  분별하고주님으로  양식을  삼는 믿음과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참여하는  자라야 합니다. (고전11:27-30)



히브리  이름은  사람의  성격과  본질을 나타냅니다이름은  그  인격 자체와  그  인격의  임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장엄하고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 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분의 임재하심을 구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곧 그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이 될 수 있습니다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보내십시오관심의 초점을 그 분의 이름에 맞추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하나님께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그 분의 이름은 그 분의 임재를 나타냅니다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되게 하는 것이고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한 예배하는 방법은 

그 이름을 송축함”(96:2), “그 이름을 부름”(80:18), “그 이름을 선포함”(22:22), “그 이름을 경외 함”(86:11), “그의 이름을 감사함”(106:47, 44:8),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림”(86:9), “그의 이름을 자랑함”(105:3), “그 이름을 의지함”(52:9, 33:21), “그의 이름을 앎”(9:10), “그의 이름으로 손을 듦”(63:4), “그 이름을 사랑함”(5:11), “그의 이름을 찬양함”(7:17, 66:4), “그 이름을 기뻐 함”(89:15-16), “그의 이름을 기억함”(119:55), “그의 이름을 찾음”(83:16) 등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관심을 그 분에게로그 분의 존재로그 분이 하시는 일로 이끕니다하나님이 하나님 이심을 그 자체로 찬양합시다하나님이 해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 합시다그 분을 영화롭게 하고그 분을 사랑하고 찾고 경배 합시다

    

예배는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 항복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 없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뜻을 결코 우리의 인생에 나나태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차선의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에게 연단과 심판과 진노마저도 하나님은 항상 사랑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시든지 그것이 항상 최선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최선이라는 사실을 또한 받아들일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전지 하십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 무엇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 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최선인가? 혹은 옳은가?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에게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즉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적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신다면 그 분이 스스로 나에게 행행 할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최선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으며,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 나의 삶이 놓여 있는 것을 깨닫는다면 나는 어린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때 나는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세상맛에 길들지 않기 위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휴가철이 끝나고 겨울이 가까워지면 유럽해안에서는 모래사장에 갈매기들이 죽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환경오염 때문인 줄 알았지만 조사해본 결과 관광객들이 던져준 과자와 빵에 입맛이 길들여 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은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져 바다에 있는 먹이의 식욕을 상실해 버려 주위에 풍부한 먹이들이 있음에도 굶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음식들 때문에 많은 동물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는 자연의 본성을 잃어 버려 동물원을 떠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의 생태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맛을 지닌 존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상맛에 길들여져 세상과 서로 단 맛을 주고받는 공생관계가 되면 그리스도인은 소금의 짠 맛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영적인 감각은 사라지고 열망은 식어 집니다.


세상의 맛에 길들여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생명의 양식을 주어도 제대로 받아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결국은 좁은 길을 버리고 멸망의 넓은 길이 더 좋아 보여 계속 그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맛을 잃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세상이 맛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은 그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Happy Day 생명축제”을 엽니다. 당신은 세상에 소금 맛의 영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영국의 장군이요 정치가인 웰링턴 장군은 시간을 잘 지키기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어느 고관과 런던 타워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물론 정시에 약속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고관은 5분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장군은 시계를 보면서 "5분이나 늦었군."하며 불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각한 고관은 "각하! 겨우 5분밖에 늦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웰링턴은 "겨우 5분이라고? 그 시간 때문에 우리 군대가 패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요? 5분의 시간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웰링턴장군이 그 고관과 또 만날 일이 생겨 시간약속을 했습니다. 그 고관은 지난번의 일이 생각되어 5분 일찍 나와서 장군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을 맞춰 도착한 웰링턴장군을 만나자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장한 일을 했다는 듯 말했습니다. "각하!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제가 5분 더 일찍 나왔습니다." 그러자 웰링턴 장군은 이번에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5분의 가치를 모른 사람이군요. 5분이나 일찍 왔으니 당신은 아까운 5분을 낭비하고 만 것이지요!" 

 

이 일화는 시간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주어진 삶의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면 금 쪽같이 귀한 시간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후회가 일지 않습니까?  

 

모세는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9,10,12)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은 날들을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는 것.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을 행하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HAPPY DAY생명축제”나도 한 생명을 위하여 헌신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미국 스포츠계에는 각 종목별로 많은 흑인선수들이 진출해 있습니다. 농구는 선수의 80%, 미식축구는 70%, 비율이 가장 낮은 종목이 프로야구인데 그 비율이 17%라고 합니다. 모든 운동 경기를 통틀어서 최초로 프로 무대에 등장한 흑인선수는 1947년 프로 야구선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바 있는 재키 로빈슨이라는 사람입니다. 

 

흑인인 그를 최초로 받아들인 구단은 뉴욕에 있는 브루클린 다저스(지금은 연고지를 옮겨 LA다저스)입니다. 구단주인 브렌치 리키는 처음 경기에 임하는 재키 로빈슨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꼭 읽어봐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해줬다고 합니다. 

 

“이제 네가 매번 경기장에 들어설 때마다 욕설과 야유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물건을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감정적인 보복이나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너는 지금 네 자신만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흑인 전체의 명예를 걸고 뛴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과연 구단주의 말대로 재키 로빈슨은 관중이 집어던진 물건에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오물에 젖기도 하고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며 흑인의 명예를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2루수로서의 자기 위치를 지켜 내어 메이저리그 영구결번 42번 선수가 됨으로 흑인 운동선수로서의 첫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 일에는 진통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제대로 된 변화는 굉장한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새로운 역사를 이루려고 할 때 겪는 바는 동일합니다. 이때 누군가가 공동체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때 그 결과의 열매로 후에는 복을 받아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무장한 한 사람이 정말 변화 하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납니다.

 

우리 사랑으로사는교회 성도님들은 지금 교회의 기초를 놓고 있는 개척자들입니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재키 로빈슨이 된다면 전도의 길, 부흥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어느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이 근처 산에서 발견한 독수리 알을 집으로 가져와 암탉이 알을 품을 때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병아리와 독수리가 알에서 함께 깨어났습니다.

 

이 독수리 새끼는 자기가 병아리라 생각하면서 병아리와 똑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독수리 하나가 닭장 위를 맴돌다 멋지게 날아갔습니다. “나하고 정말 닮았다. 나는 여태까지 옆의 병아리하고 왜 안 닮았나 했는데, 나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저 어마어마한 새하고 많이 닮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수리 새끼는 그제서야 자기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고 자신이 누군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정체성과 진정한 자아상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 새끼는 말했습니다. “나는 병아리가 아니야! 나는 저 독수리를 닮았어! 이 닭장은 내게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나는 높은 하늘을 날고 바위산을 오르는 독수리다!” 

 

새끼 독수리는 지금까지 병아리라고 생각하고 병아리처럼 행동했으나 이 모든 것을 다 청산하였습니다. 날갯짓을 해보니 높이 솟아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새끼독수리는 진짜 독수리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자아상을 그리고 있습니까? 그간의 환경과 불투명한 미래로 닭장 속에 갇혀 있는 병아리 같은 자아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서 있는 곳이 벼랑 끝 같아 그저 두렵고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합니까?

 

로버트 쉴러의 글입니다.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a) 성경이 말하는 내가 진정한 나입니다.